이토록 사랑스러운 이방인
- 설명
- 작품
‘차가운 도시의 빌딩 숲을 달콤하고 부드러운 케이크 숲으로 바꾸고 싶었다’고 말하는 작가들이 있다. 남매 아티스트 듀오 ‘스테퍼(STEPPER)’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회화 속에는 언제나 어딘가에 속하지 못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고독은 씁쓸하기보다는 달콤하고, 불안하기보다는 위트 있게 느껴진다. 스테퍼는 도시의 이방인으로 살아오며 체감한 감정을 ‘사랑스러운 이방인(A LOVELY STRANGER)’이라는 세계관 아래 자신들만의 시각 언어로 풀어낸다.
스테퍼를 이루는 두 작가, 재치(여동생)와 율(오빠)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그림과 가까웠다. 둘 다 미술 유치원을 다녔고, 외가 친척 중에도 예술을 전공한 이들이 있었다. 다만 처음부터 작가라는 진로를 명확히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재치는 음악과 영화 등 ‘표현하는 모든 매체’에 관심이 많았고, 그중 가장 자신에게 잘 맞는 것이 그림이었다고 말한다. 전공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지만, 먼저 미대에 진학한 네 살 터울의 오빠 율의 선택은 재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재치는 “그리는 걸 공부할 수 있고, 그게 직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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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OVELY STRANGER MY SWEET CITY_03>
2023 • 원화 • 아크릴, 모델링 페이스트 • 130.3x130.3x3.5 cm
율의 출발점은 그림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에 대한 관심이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자동차 디자인에 흥미가 생겨 미대 입시를 준비하고, 그러다 디자인 영상 학부에 진학했다. 지금 돌아보면 특정 장르보다도, 작업이 만들어지고 구조화되는 과정 자체에 끌렸다는 생각이 든다.
남매는 이렇듯 자연스럽게 미술을 전공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이 어릴 때보다 오히려 성인이 된 이후 더 많은 공감대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고군분투하며 쌓인 경험과 이야기가 생긴 뒤, 비로소 서로의 상상력이 본격적으로 교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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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듀오 스테퍼STEPPER(율, 재치)
스테퍼 이전, 재치의 작업은 철저히 ‘나’라는 축에 머물러 있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작업이 불가능하다고 느꼈고,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웠던 내면을 해부하듯 그림으로 옮겼다. 이 태도는 지금도 개인 작업의 기반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작가로서 진지하고도 중요한 질문이 생겼다. 그림을 그리고, 판매하고,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순환 구조 안에서 ‘작가’라는 직업은 어떻게 기능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시기에 율과의 대화가 잦아졌고, 개인의 내면에서 벗어나 ‘관계’라는 새로운 시야가 열렸다.
남매로 살아온 시간의 기억, 서울이라는 대도시로 흘러 들어온 삶, 그리고 이방인으로서의 감정까지. 둘은 그림 이야기뿐 아니라 삶에 대한 긴 대화를 나눴다. 지금의 작품 주제와 시리즈 대부분은 그 시절의 대화에서 비롯됐고, 수다를 좋아하는 내향적인 두 사람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스테퍼(STEPPER)’라는 이름으로 팀을 결성했다.
‘STEPPER’는 사전에 ‘걸어서 나아가는 사람’이라 나와 있다. 재치와 율은 여기에 그들만의 의미를 더했다. 과거의 어려움이나 현실의 족쇄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고 싶은 의지를 담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스테퍼는 팀 결성 이후 지난 3년간 멈추지 않고 전진했다. 전시와 아트페어는 물론, 관객과 직접 호흡하는 참여형 프로젝트, 브랜드와의 협업, 다양한 매체 실험까지.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작가로서 ‘작업을 보여주는 일’에 머물지 않고, 그림이 일상 속에서 소비되는 방식을 넓히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스테퍼의 세계관은 한층 탄탄해졌고, 시리즈는 더 입체적인 서사로 확장됐다.
그렇다면 스테퍼는 듀오로서 어떻게 작업을 설계하고, 캐릭터와 시리즈를 구축하며, 관객과의 접점을 넓혀왔을까.
‘A LOVELY STRANGER’라는 세계관이 만들어낸 지난 3년의 시간과 앞으로의 행보를 직접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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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UE HOUR_04>
2026 • 원화 • 60.6x60.6x2 cm
듀오 작업인 만큼 역할 분담이나 협업 방식이 독특할 것 같습니다.
율) 50 대 50으로 영역을 딱 나누지는 않아요. 전공자인 재치 작가가 전반적인 작업을 이끌면, 저는 팀의 기획과 시리즈의 전개 방식 같은 틀을 잡습니다. 저희 방식을 영화에 비유하자면, 공통 관심사로 시놉시스를 쓰고 서로 살을 붙인 뒤, 각자의 주특기를 발휘해 미술팀도 되었다가 캐스팅 팀도 되는 식이에요. 여러 역할을 유동적으로 수행하며 시리즈가 탄력 있는 이야기를 갖도록 협심합니다.
작품의 시리즈가 되는 ‘케이크’나 ‘테니스’ 같은 소재가 정말 매력적입니다. 작품의 영감은 어디서 얻으시나요?
재치) 저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나 스쳐 지나가는 일상적인 감정에 관심이 많아요. 대부분의 저희 작업은 대화, 일기, 짤막한 메모에서 온 일상적인 이야기에 소재를 입히는데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거기에 조금 더 드라마틱한 구성을 더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케이크는 “도시의 차가운 빌딩 숲을 케이크 숲으로 바꿔주고 싶다”는 율 작가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어요. 저희가 이방인으로서 느낀 ‘고독감’에 ‘달콤한 케이크’라는 소재를 입혀서, 쓸쓸한 감정을 달콤함으로 치환한 거죠. 테니스는 율 작가가 실제로 좋아하는 운동인데, 여기에 ‘승부를 가르는 샷’이라는 드라마틱한 구성과 ‘내 승부에 관심 없는 타인들’이라는 연출을 더해 극적인 효과를 줍니다.
스테퍼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이방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스테퍼) 저희 작업의 코어는 ‘A LOVELY STRANGER’입니다. 원래 저희의 기저에는 다소 네거티브한 감정이 깔려 있던 거 같아요. 익숙한 곳을 벗어나 대도시로 들어오며 느꼈던 뿌리내리지 못한 마음, 고독감이 동력이 됐죠. 하지만 도시는 결국 각각의 ‘외딴섬’ 같은 존재들이 모인 곳임을 깨닫고는, 그 뾰족했던 마음을 타인에 대한 관대한 시선으로 바꾸게 됐어요. 다행히 저희에겐 소공녀 세라처럼 누추한 다락방을 성으로 만드는 상상력이 있어서, 이걸 그림으로 풀어내고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섞여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이방인’으로서 바라보는 시각이 작업을 이끌어가는 동력이에요.
팀을 결성한 후 처음 탄생한 작품과 지금까지 해 온 작품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스테퍼) ‘A LOVELY STRANGER’라는 큰 코어 안에서 처음 시작한 작업들이 ‘MY SWEET CITY’, 그리고 ‘A BITTERSWEET LIFE’ 입니다. 팀 작업을 시작하고 참여한 첫 페어에서 ‘MY SWEET CITY’ 시리즈의 01번이 판매되었어요. 꽤 큰 대형 작업이라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땐 SNS 계정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완전 신인 작가였는데, 정말 저희 그림이 좋아서 구매하셨구나 싶어서 작업을 이어갈 큰 힘이 되었어요. 저희 남매가 의기투합해 만든 첫 작업이라 특히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하고요. 관람객분들은 저희 시리즈들을 고루 좋아해 주시긴 하는데, 컬렉터분들은 특히 페인팅만의 마티에르가 살아있는 작업들을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여러 시리즈 속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눈에 띕니다. 강아지 ‘폴’과 ‘빨강 머리 여인’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스테퍼) 강아지 ‘폴’은 영화 <마스크>의 용감한 강아지 ‘마일로’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어디서든 당당한 존재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만든 캐릭터죠. 빨강 곱슬머리 여인은 사실 재치 작가의 외모를 반영한 것인데, ‘곱슬머리는 고집이 세다’는 식의 사회적 통념을 사랑스러운 개성으로 뒤집어 표현한 ‘이방인’의 표상입니다.
이외에도 ‘슭곰발’과 ‘토끼’가 있어요. 이 친구들은 주로 함께 등장하는데, 슭곰발은 험상궂게 생겼지만 부드럽고 순하고, 토끼 탈을 쓴 어린아이는 귀엽게 생겼지만 앙칼진 면모가 있다는 설정이에요. 과슈 드로잉 ‘HEY, BUDDY!’ 시리즈에서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연도별 아카이빙을 보면 화풍이 달라지는 변화가 느껴집니다. 의도적인 변화인가요?
스테퍼) 저희는 시작부터 여러 시리즈를 거의 동시에 전개해 왔어요. 매체도 다양한 편이고,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하다 보니 보여줄 수 있는 요소 자체가 많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화풍이 바뀌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예를 들어 페인팅 작업에서 같은 ‘케이크’ 소재를 사용하더라도, ‘MY SWEET CITY’에서는 빌딩 숲처럼 빽빽한 구도로 도시 전체를 거시적으로 보여주고, 그 안을 생명체들로 활력 있게 채워 넣습니다. 반대로 ‘THE BLUE HOUR’에서는 케이크 집 한 채를 클로즈업해 쓸쓸하면서도 위트 있는 분위기와 어두운 채도를 강조하기도 해요.
또 같은 ‘젊음’을 다루더라도 ‘미지_UNKNOWN’에서는 장면 구성보다는 질감과 행위의 동력, 추상적인 감각을 더 중요하게 사용합니다. 반면 ‘YOUTH’에서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신(scene) 중심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미장센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장면을 설계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화풍이 변했다기보다는, 애초에 시각적 효과와 질감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이 저희 작업의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연작을 만들 때도 시점이나 거리감을 바꾸거나 소재를 달리하면서 계속 변주를 주고 있습니다.
시리즈마다 반응 차이는 있지만, 외부 반응이 저희 작업 방향에 영향을 주지는 않아요. 저희는 기본적으로 ‘하고 싶은 걸 많이 해 놓고 보여드리자’라는 태도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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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H_WINNINGSHOT>
2023 • 원화 • 아크릴 • 97x162.2x3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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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unknown_38>
2026 • 원화 • 22x22x3.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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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unknown_37>
2025 • 원화 • 아크릴, 모델링 페이스트 • 22x22x3.5 cm
스테퍼의 작품은 그 자체로 대중 친화적인 매력을 갖고 있지만, 관객 참여형 전시, 브랜드와의 협업 등 적극적인 소통과 대외 활동 또한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스테퍼) 전시는 작가라면 늘 마주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해요. 다만 전시만으로는 관객과의 거리를 충분히 좁히기 어렵다고 느껴, 참여형 프로젝트나 다양한 외부 활동을 병행해 왔습니다. 관람객이 직접 작업 과정에 참여하는 경험은, 흰 벽에 걸린 작품 앞에서 느끼는 거리감을 빠르게 허무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브랜드 협업 역시 저희에겐 ‘일상에서의 예술’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작품 이미지가 상품과 결합해 오브제로 소비자의 공간에 놓일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이 생활 속으로 스며드는 가능성을 발견한 의미 있는 기회였죠. 협업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명확합니다. 협업을 요청한 주체가 원하는 방향이 스테퍼가 지향하는 바와 맞닿아 있는지 여부입니다. 새로운 시도일지라도 충분한 대화를 통해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작업이라고 판단되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그 과정 자체가 또 다른 성장의 기회가 된다고 믿고 있어요.
스테퍼 작품의 매력이라면 ‘다작’이 아닐까 싶어요. 다양한 시리즈뿐만 아니라 판화, 과슈 드로잉 등 다채로운 미디어로 창작되는 작품이 꽤 많습니다.
스테퍼) 팀 작업을 하는 만큼 다작은 필수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는 이유는 관람자와 컬렉터에게 폭넓은 선택지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작품을 구매하는 연령층이 다양해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으며, 매체와 사이즈에 따라 가격대를 다양하게 구성하면 각자의 상황에 맞는 소비가 가능해져 그림의 문턱을 낮출 수 있다고 기대해요.
일례로 그림 소비가 자연스러운 문화권에서 사람들이 오래된 LP를 뒤적거리듯 작품을 고르는 장면을 본 적이 있어요. 그게 너무 인상 깊어서 실제 저희가 전시와 페어에 참가했을 때 소형 작업과 드로잉을 직접 제작한 LP장에 비치한 전시 방식을 기획한 적이 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어요. 이때 ‘접근 방식을 쉽게 만들면 그림의 문턱을 낮아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죠. 이후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매체와 다양한 사이즈의 작업을 꾸준히 구성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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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퍼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기를 바라나요?
스테퍼) 컬렉팅된 작품을 보낼 때마다 편지 말미에 늘 “보시는 내내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깁니다. 저희는 진심으로 공감되는 그림, 보시는 분이 자연스럽게 웃음 지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가끔 저희 그림을 보고 ‘숨기는 게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는데, 복잡한 해석보다 그림 안에 담아둔 작은 메시지들이 보는 분들 마음에 바로 닿기를 바랍니다.
팀을 만들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1가구 1스테퍼 그림’을 목표로 하자고 한 적이 있어요. 그 말 안에 저희가 지향하는 방향이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작은 드로잉부터 대형 페인팅까지 다양한 작업을 하는 이유도, 그림을 소비하는 방식이 하나로 정해지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음악을 듣는 방식이 다양하듯, 그림도 각자의 방식으로 편안하게 소장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을 소장하는 일이 부담스럽기보다는 가볍지만 가치 있는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듯 그림을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고, 또 정말 가치 있다고 느낀다면 아껴둔 비상금으로라도 저희 작품을 소장하고 싶을 만큼,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작가가 된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또 어떤 새로운 길로 ‘스텝’을 내디디실 예정인가요?
스테퍼) 평면 작업을 넘어 오브제 작업에 도전해보려 합니다. 하반기에는 개인전도 계획 중이고요. 장기적으로는 서울을 넘어 다양한 도시에서 이방인이 되어 ‘A LOVELY STRANGER IN ____’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익숙하지 않은 시선에는 날것 그대로를 꿰뚫어 보는 힘이 있다고 믿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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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도시의 빌딩 숲을 달콤하고 부드러운 케이크 숲으로 바꾸고 싶었다’고 말하는 작가들이 있다. 남매 아티스트 듀오 ‘스테퍼(STEPPER)’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회화 속에는 언제나 어딘가에 속하지 못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고독은 씁쓸하기보다는 달콤하고, 불안하기보다는 위트 있게 느껴진다. 스테퍼는 도시의 이방인으로 살아오며 체감한 감정을 ‘사랑스러운 이방인(A LOVELY STRANGER)’이라는 세계관 아래 자신들만의 시각 언어로 풀어낸다.
스테퍼를 이루는 두 작가, 재치(여동생)와 율(오빠)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그림과 가까웠다. 둘 다 미술 유치원을 다녔고, 외가 친척 중에도 예술을 전공한 이들이 있었다. 다만 처음부터 작가라는 진로를 명확히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재치는 음악과 영화 등 ‘표현하는 모든 매체’에 관심이 많았고, 그중 가장 자신에게 잘 맞는 것이 그림이었다고 말한다. 전공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지만, 먼저 미대에 진학한 네 살 터울의 오빠 율의 선택은 재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재치는 “그리는 걸 공부할 수 있고, 그게 직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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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OVELY STRANGER MY SWEET CITY_03>
2023 • 원화 • 아크릴, 모델링 페이스트 • 130.3x130.3x3.5 cm
율의 출발점은 그림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에 대한 관심이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자동차 디자인에 흥미가 생겨 미대 입시를 준비하고, 그러다 디자인 영상 학부에 진학했다. 지금 돌아보면 특정 장르보다도, 작업이 만들어지고 구조화되는 과정 자체에 끌렸다는 생각이 든다.
남매는 이렇듯 자연스럽게 미술을 전공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이 어릴 때보다 오히려 성인이 된 이후 더 많은 공감대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고군분투하며 쌓인 경험과 이야기가 생긴 뒤, 비로소 서로의 상상력이 본격적으로 교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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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듀오 스테퍼STEPPER(율, 재치)
스테퍼 이전, 재치의 작업은 철저히 ‘나’라는 축에 머물러 있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작업이 불가능하다고 느꼈고,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웠던 내면을 해부하듯 그림으로 옮겼다. 이 태도는 지금도 개인 작업의 기반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작가로서 진지하고도 중요한 질문이 생겼다. 그림을 그리고, 판매하고,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순환 구조 안에서 ‘작가’라는 직업은 어떻게 기능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시기에 율과의 대화가 잦아졌고, 개인의 내면에서 벗어나 ‘관계’라는 새로운 시야가 열렸다.
남매로 살아온 시간의 기억, 서울이라는 대도시로 흘러 들어온 삶, 그리고 이방인으로서의 감정까지. 둘은 그림 이야기뿐 아니라 삶에 대한 긴 대화를 나눴다. 지금의 작품 주제와 시리즈 대부분은 그 시절의 대화에서 비롯됐고, 수다를 좋아하는 내향적인 두 사람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스테퍼(STEPPER)’라는 이름으로 팀을 결성했다.
‘STEPPER’는 사전에 ‘걸어서 나아가는 사람’이라 나와 있다. 재치와 율은 여기에 그들만의 의미를 더했다. 과거의 어려움이나 현실의 족쇄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고 싶은 의지를 담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스테퍼는 팀 결성 이후 지난 3년간 멈추지 않고 전진했다. 전시와 아트페어는 물론, 관객과 직접 호흡하는 참여형 프로젝트, 브랜드와의 협업, 다양한 매체 실험까지.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작가로서 ‘작업을 보여주는 일’에 머물지 않고, 그림이 일상 속에서 소비되는 방식을 넓히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스테퍼의 세계관은 한층 탄탄해졌고, 시리즈는 더 입체적인 서사로 확장됐다.
그렇다면 스테퍼는 듀오로서 어떻게 작업을 설계하고, 캐릭터와 시리즈를 구축하며, 관객과의 접점을 넓혀왔을까.
‘A LOVELY STRANGER’라는 세계관이 만들어낸 지난 3년의 시간과 앞으로의 행보를 직접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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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UE HOUR_04>
2026 • 원화 • 60.6x60.6x2 cm
듀오 작업인 만큼 역할 분담이나 협업 방식이 독특할 것 같습니다.
율) 50 대 50으로 영역을 딱 나누지는 않아요. 전공자인 재치 작가가 전반적인 작업을 이끌면, 저는 팀의 기획과 시리즈의 전개 방식 같은 틀을 잡습니다. 저희 방식을 영화에 비유하자면, 공통 관심사로 시놉시스를 쓰고 서로 살을 붙인 뒤, 각자의 주특기를 발휘해 미술팀도 되었다가 캐스팅 팀도 되는 식이에요. 여러 역할을 유동적으로 수행하며 시리즈가 탄력 있는 이야기를 갖도록 협심합니다.
작품의 시리즈가 되는 ‘케이크’나 ‘테니스’ 같은 소재가 정말 매력적입니다. 작품의 영감은 어디서 얻으시나요?
재치) 저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나 스쳐 지나가는 일상적인 감정에 관심이 많아요. 대부분의 저희 작업은 대화, 일기, 짤막한 메모에서 온 일상적인 이야기에 소재를 입히는데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거기에 조금 더 드라마틱한 구성을 더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케이크는 “도시의 차가운 빌딩 숲을 케이크 숲으로 바꿔주고 싶다”는 율 작가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어요. 저희가 이방인으로서 느낀 ‘고독감’에 ‘달콤한 케이크’라는 소재를 입혀서, 쓸쓸한 감정을 달콤함으로 치환한 거죠. 테니스는 율 작가가 실제로 좋아하는 운동인데, 여기에 ‘승부를 가르는 샷’이라는 드라마틱한 구성과 ‘내 승부에 관심 없는 타인들’이라는 연출을 더해 극적인 효과를 줍니다.
스테퍼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이방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스테퍼) 저희 작업의 코어는 ‘A LOVELY STRANGER’입니다. 원래 저희의 기저에는 다소 네거티브한 감정이 깔려 있던 거 같아요. 익숙한 곳을 벗어나 대도시로 들어오며 느꼈던 뿌리내리지 못한 마음, 고독감이 동력이 됐죠. 하지만 도시는 결국 각각의 ‘외딴섬’ 같은 존재들이 모인 곳임을 깨닫고는, 그 뾰족했던 마음을 타인에 대한 관대한 시선으로 바꾸게 됐어요. 다행히 저희에겐 소공녀 세라처럼 누추한 다락방을 성으로 만드는 상상력이 있어서, 이걸 그림으로 풀어내고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섞여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이방인’으로서 바라보는 시각이 작업을 이끌어가는 동력이에요.
팀을 결성한 후 처음 탄생한 작품과 지금까지 해 온 작품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스테퍼) ‘A LOVELY STRANGER’라는 큰 코어 안에서 처음 시작한 작업들이 ‘MY SWEET CITY’, 그리고 ‘A BITTERSWEET LIFE’ 입니다. 팀 작업을 시작하고 참여한 첫 페어에서 ‘MY SWEET CITY’ 시리즈의 01번이 판매되었어요. 꽤 큰 대형 작업이라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땐 SNS 계정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완전 신인 작가였는데, 정말 저희 그림이 좋아서 구매하셨구나 싶어서 작업을 이어갈 큰 힘이 되었어요. 저희 남매가 의기투합해 만든 첫 작업이라 특히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하고요. 관람객분들은 저희 시리즈들을 고루 좋아해 주시긴 하는데, 컬렉터분들은 특히 페인팅만의 마티에르가 살아있는 작업들을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여러 시리즈 속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눈에 띕니다. 강아지 ‘폴’과 ‘빨강 머리 여인’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스테퍼) 강아지 ‘폴’은 영화 <마스크>의 용감한 강아지 ‘마일로’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어디서든 당당한 존재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만든 캐릭터죠. 빨강 곱슬머리 여인은 사실 재치 작가의 외모를 반영한 것인데, ‘곱슬머리는 고집이 세다’는 식의 사회적 통념을 사랑스러운 개성으로 뒤집어 표현한 ‘이방인’의 표상입니다.
이외에도 ‘슭곰발’과 ‘토끼’가 있어요. 이 친구들은 주로 함께 등장하는데, 슭곰발은 험상궂게 생겼지만 부드럽고 순하고, 토끼 탈을 쓴 어린아이는 귀엽게 생겼지만 앙칼진 면모가 있다는 설정이에요. 과슈 드로잉 ‘HEY, BUDDY!’ 시리즈에서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연도별 아카이빙을 보면 화풍이 달라지는 변화가 느껴집니다. 의도적인 변화인가요?
스테퍼) 저희는 시작부터 여러 시리즈를 거의 동시에 전개해 왔어요. 매체도 다양한 편이고,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하다 보니 보여줄 수 있는 요소 자체가 많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화풍이 바뀌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예를 들어 페인팅 작업에서 같은 ‘케이크’ 소재를 사용하더라도, ‘MY SWEET CITY’에서는 빌딩 숲처럼 빽빽한 구도로 도시 전체를 거시적으로 보여주고, 그 안을 생명체들로 활력 있게 채워 넣습니다. 반대로 ‘THE BLUE HOUR’에서는 케이크 집 한 채를 클로즈업해 쓸쓸하면서도 위트 있는 분위기와 어두운 채도를 강조하기도 해요.
또 같은 ‘젊음’을 다루더라도 ‘미지_UNKNOWN’에서는 장면 구성보다는 질감과 행위의 동력, 추상적인 감각을 더 중요하게 사용합니다. 반면 ‘YOUTH’에서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신(scene) 중심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미장센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장면을 설계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화풍이 변했다기보다는, 애초에 시각적 효과와 질감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이 저희 작업의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연작을 만들 때도 시점이나 거리감을 바꾸거나 소재를 달리하면서 계속 변주를 주고 있습니다.
시리즈마다 반응 차이는 있지만, 외부 반응이 저희 작업 방향에 영향을 주지는 않아요. 저희는 기본적으로 ‘하고 싶은 걸 많이 해 놓고 보여드리자’라는 태도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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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H_WINNINGSHOT>
2023 • 원화 • 아크릴 • 97x162.2x3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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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unknown_38>
2026 • 원화 • 22x22x3.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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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unknown_37>
2025 • 원화 • 아크릴, 모델링 페이스트 • 22x22x3.5 cm
스테퍼의 작품은 그 자체로 대중 친화적인 매력을 갖고 있지만, 관객 참여형 전시, 브랜드와의 협업 등 적극적인 소통과 대외 활동 또한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스테퍼) 전시는 작가라면 늘 마주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해요. 다만 전시만으로는 관객과의 거리를 충분히 좁히기 어렵다고 느껴, 참여형 프로젝트나 다양한 외부 활동을 병행해 왔습니다. 관람객이 직접 작업 과정에 참여하는 경험은, 흰 벽에 걸린 작품 앞에서 느끼는 거리감을 빠르게 허무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브랜드 협업 역시 저희에겐 ‘일상에서의 예술’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작품 이미지가 상품과 결합해 오브제로 소비자의 공간에 놓일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이 생활 속으로 스며드는 가능성을 발견한 의미 있는 기회였죠. 협업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명확합니다. 협업을 요청한 주체가 원하는 방향이 스테퍼가 지향하는 바와 맞닿아 있는지 여부입니다. 새로운 시도일지라도 충분한 대화를 통해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작업이라고 판단되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그 과정 자체가 또 다른 성장의 기회가 된다고 믿고 있어요.
스테퍼 작품의 매력이라면 ‘다작’이 아닐까 싶어요. 다양한 시리즈뿐만 아니라 판화, 과슈 드로잉 등 다채로운 미디어로 창작되는 작품이 꽤 많습니다.
스테퍼) 팀 작업을 하는 만큼 다작은 필수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는 이유는 관람자와 컬렉터에게 폭넓은 선택지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작품을 구매하는 연령층이 다양해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으며, 매체와 사이즈에 따라 가격대를 다양하게 구성하면 각자의 상황에 맞는 소비가 가능해져 그림의 문턱을 낮출 수 있다고 기대해요.
일례로 그림 소비가 자연스러운 문화권에서 사람들이 오래된 LP를 뒤적거리듯 작품을 고르는 장면을 본 적이 있어요. 그게 너무 인상 깊어서 실제 저희가 전시와 페어에 참가했을 때 소형 작업과 드로잉을 직접 제작한 LP장에 비치한 전시 방식을 기획한 적이 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어요. 이때 ‘접근 방식을 쉽게 만들면 그림의 문턱을 낮아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죠. 이후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매체와 다양한 사이즈의 작업을 꾸준히 구성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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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퍼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기를 바라나요?
스테퍼) 컬렉팅된 작품을 보낼 때마다 편지 말미에 늘 “보시는 내내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깁니다. 저희는 진심으로 공감되는 그림, 보시는 분이 자연스럽게 웃음 지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가끔 저희 그림을 보고 ‘숨기는 게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는데, 복잡한 해석보다 그림 안에 담아둔 작은 메시지들이 보는 분들 마음에 바로 닿기를 바랍니다.
팀을 만들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1가구 1스테퍼 그림’을 목표로 하자고 한 적이 있어요. 그 말 안에 저희가 지향하는 방향이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작은 드로잉부터 대형 페인팅까지 다양한 작업을 하는 이유도, 그림을 소비하는 방식이 하나로 정해지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음악을 듣는 방식이 다양하듯, 그림도 각자의 방식으로 편안하게 소장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을 소장하는 일이 부담스럽기보다는 가볍지만 가치 있는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듯 그림을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고, 또 정말 가치 있다고 느낀다면 아껴둔 비상금으로라도 저희 작품을 소장하고 싶을 만큼,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작가가 된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또 어떤 새로운 길로 ‘스텝’을 내디디실 예정인가요?
스테퍼) 평면 작업을 넘어 오브제 작업에 도전해보려 합니다. 하반기에는 개인전도 계획 중이고요. 장기적으로는 서울을 넘어 다양한 도시에서 이방인이 되어 ‘A LOVELY STRANGER IN ____’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익숙하지 않은 시선에는 날것 그대로를 꿰뚫어 보는 힘이 있다고 믿거든요.